본문 바로가기

아시아

앙코르 유적의 보고

728x90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 킬링필드는 캄보디아의 아픈 실상을 잘 보여준 작품이다.
1975-79년까지 희대의 살인마 폴포트 정권은 이상적인 공산주의를 건설한다는
미명아래 750만 명의 인구 중 약 200만 이상을 학살한다.

소위 지식층이라 불리는 학자와 의사, 지주, 학생은 물론이고 어린 아이들까지 끔찍한
만행에 희생됐다. 특히 '안경을 쓰고 책가방을 들고 다닌다'는 트집과 '손이 너무 곱다'
는 것이 이유 중 하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25년 전 캄보디아에서는 말로 표현 못할
참혹한 살인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만행자들은 총알을 아끼기 위해 죽창과 곡괭이 등 원시적인 무기를 동원해 망자들의
고통을 더욱 심하게 했다. 만행의 후유증은 지식층의 붕괴로 이어져 한때 정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들이 100명 정도라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다.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드넓은 평야. 농사일로 검게 그을린 얼굴의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대화가 끊어질 줄 모르고 이어진다. 2~3모작이 가능하다고
모내기를 게을리하거나 볕씨 이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마음놓고 들판을 활보한다는 것은 가히 상상치 못했던 일이다. 캄보디아 사람들의
아픈 과거를 안다면 농부들의 웃음과 시끌 벅적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여인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이곳의 프놈펜은 아픈 역사를 뒤로하고
지금 변화와 개방의 중심에 서 있다.

상점마다 옷가지와 값비싼 전자제품까지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다. 가족의 생일 결혼 등
중요한 날에 찾는 꽃시장도 활기를 찾은 지 오래다. 내전으로 중지됐던 도시 곳곳은
공사로 복잡하다. 파헤쳐진 도로는 어느새 새롭게 단장되었고 신축 빌딩들의 모습도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그동안 신자들의 발길이 뜸했던 사찰들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열대 과일과 연꽃 향불은 절에 갈 때 지참해야 할 필수품이다.

전쟁이라는 가혹한 아픔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쉴새없이 이어지는 기도와 신앙심이었다고
한다. 대낮의 시내의 활기를 시클로(인력자전거)와 오토바이에서 찾는다면 밤의 활기는
노천카페와 식당에서 찾을 수 있다. 프놈펜 번화가로 꼽히는 아차민 거리는 프랑스 지배
당시 세워진 유럽풍의 건물이 즐비한 곳이다. 가히 프놈펜의 명동이라 할 정도로 항상 많은
인파로 활기가 넘친다. 식당 카페 입구에는 오토바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다.
별다른 교통 수단이 없는 이곳에서 오토바이가 자가용인 셈이다.

수도 프놈펜에서 서북쪽으로 320km에 위치한 시엠립은 앙코르(Ankor)유적을 보기 위해선
꼭 거쳐야 할 도시다. 인도차이나 유적지 웅 백미로 꼽히는 앙코르는 1년에 6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오며 이들이 쓰고 가는 돈만 1억 2000만 불이 넘는다고 한다.

790~1432년 캄보디아를 통치했던 앙코르 왕조는 그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앙코르 유적을
세운다. 앙코르 왓트(거대한 사원)와 앙코르 톰(거대한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불교와 힌두교
사원이 무려 300여개에 달한다. 앙코르 왓트의 중앙탑 높이는 최대 63m이고 사원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1700개로 무게는 7t에 달한다.

"광활한 밀림에 원형 지붕을 가진 웅장한 건물이 높이 솟아있는데 숲보다 훨씬 높은 건물에서는
달빛에 반사된 보석들이 눈부신 광채를 낸다."라고 프랑스의 탐험가 앙리 무어는 앙코르 유적
발견 당시의 감동을 기록하고 있다.

300년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기도 했던 앙코르 유적은 1860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앙리 무어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1113~1145년 스리야바르만 2세의 명령으로 지어진
사원들 내부는 셀 수 없이 많은 보석으로 치장을 했다고 한다. 그동안 잦은 외세의 침입과
약탈로 많은 유물과 보석들이 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상태다. 9세기에 시작된 크메르
왕조는 12~13세기 전성기를 맞아 인도차이나 전역을 호령했던 대제국이었다.

왜 크메르인들은 드넓은 정글 한복판에 어마어마한 신전을 세웠는지 언제 어떤 이유로
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지, 추측만 무성할 뿐 현재까지 뚜렷한 단서는 없다.
단지 빠른 속도로 유적을 덮었던 울창한 밀림과 엄청난 전염병으로 인해 결국 몰락했다는
학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92년 유엔은 이곳을 세계 인류 문화 유산으로 지정해 국제적 관심과 이목을 끌게 했다.
외국인들에게 개방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과 종교적 상관이
없어도 웅장하고 생동감 넘치는 유적 앞에선 절로 탄성이 나올 것이다. 특히 앙코르 톰에
세워진 바이욘의 미소는 앙코르 유적의 백미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사방에서 감상할 수 있는 불상은 부처의 자혜로움을 느끼게 한다. 앙코르 왓트 역시 탑과
호수 성곽과 벽화 등은 모두 크메르인들의 우주관을 철학적으로 담고 있어 경이로움을 느낀다.
불상과 회랑 신전 벽화의 푸른 이끼는 세월의 깊이를 말해 준다. 지금 앙코르 유적 곳곳은
심각한 자연 재해로 붕괴의 위협을 맞고 있다. 캄보디아 최고 유산으로 꼽히는 앙코르는
전쟁과 내전, 약탈, 그리고 엄청난 거목의 뿌리가 유적 곳곳을 잠식하고 있다.

(국민은행 사보에서 퍼옴)

'아시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도차이나의 원류를 찾아서!  (0) 2006.07.20
여행은 신비로움이다  (0) 2006.07.20
황홀한 떠남  (0) 2006.07.20
빙하시대 물의 아름다움  (0) 2006.07.20
황산과의 만남  (0) 2006.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