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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황홀한 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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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자기 자신을 再발견하는 과정이다.
여행은 황홀한 떠남이다.
삶에는 어떤 흥분이 있어야 한다.
흥분이 없는 인생은 재미없다. 그래서 여행의 묘미가 있다.

인생은 날마다 새로운 떠남이다.
머무르기만 하는 삶은 흥분이 없다.
짜릿함이 없다.
설레임이 없다.
기대함이 없다.
인생은 떠날 수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
그래서 여행의 재미가 있다.

진을 치던 곳을 뒤돌아보면서
생각에 잠길 수 있기 때문에 여유가 있다.
자신이 머무른 곳을 돌이켜 볼 수 있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다.
아름다운 인생, 멋 있는 인생은 떠날 줄 아는 인생이다.
그래서 여행의 참맛이 있다.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언제라도 현재의 삶을 떠날 수 있다.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현실에 미련을 갖지 않는다.
어차피 현실은 잠시 거쳐 가는 시간일 뿐,
영원한 거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은 삶 자체라고 봐야 한다.

중국에 청나라 서태후를 찾아서 낯선 길을 떠났다.
6월 초입의 새벽에 선선한 날씨에 영종도 공항에 도착하여,
무덥지 않고 시원한 날씨에 느긋하게 아시아의 색동날개를 타고 갔다.

세계 최대라 일컬어지는 천안문광장을 처음 보았는데, 6.4 민주화운동을
했던 장소라고 한다. 생각보다 커 보이지는 않았다. 사람은 오전이라
거의 없었고, 햇살은 따가웠다. 천안문은 명나라 때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중앙에 모택동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그림이었다.
서북부를 제외하곤 산이 별로 없는 북경에 넓은 천안문광장은 따가운 햇살에
무더웠지만 그래도 시원한 산들바람이 이마의 더위를 식혀 주었다.

자금성이라고 부리는 명청시대의 왕궁이 중국인들은 고궁이라고 부르는 듯한데,
사각형의 둘레에 주변엔 해자를 파고 그 안에는 방이 9천9백9십9개 반이 있다고 하는데,
만이라는 숫자는 하늘을 상징해서 하나를 빼서 9999개하고 반만 있다고 한다.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의 삼대 문이 있는데, 예전에 철의 황후인 청나라 서태후가
집권하던 궁이라고 한다. 대체로 우리나라 경복궁 정도라고 보면 되나 규모는 엄청났고,
작열하는 태양에 시원한 그늘 생각뿐이었다.
건물 벽은 빨간색 지붕(기와)은 황색을 썼는데, 붉은색과 황색은 황제만이 사용하고,
고관대작은 파란색이나 녹색을 집에 사용했고, 일반 서민은 회색을 사용했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색은 파란색인데, 아마도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고관대작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
자금성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나가면 경산공원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예전에 명나라 마지막황제가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 봉기군에 습격을 당하자 황후와 황녀를 직접 죽이고 홰나무에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나무가 없다고 하지만, 슬픈 이야기이다. 한 나라의 황제가 농민에 의해
자살을 해야 했던 그 슬픔을 .... 이자성은 결국 정권을 잡지 못했다고 한다.
경산공원은 자금성의 해자를 파서 나온 흙으로 만들었는데, 약간 높은 산이라고 보면 된다.
경산공원의 전망대에 올라 자금성을 한 눈에 내려다 보니 장관이었다. 자금성의 기와가 실로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9999.5개의 방이라고 하니,가히 지붕의 바다라 할 만했다.

북경 골목의 민가를 느낄 수 있는 인력거 투어를 했는데 날씨가 무더워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론 우산식(처마식)으로 햇빛을 가려주어서 그런대로 괜찮았고, 중국 한족의 현지 가정을
방문하여 앵무새며 여러 가지 중국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다.
중국의 대문은 작은데 속으로 들어가면 여러 집으로 되어 있어서 알찬 부자라고 생각되었다.
특히 한족은 잘 씻지 않는데, 물이 귀해서 그런 습관이 들었다고 보면 될 듯하다.

태가촌이라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태국과 같은 종족이라고 한다. 남자는 왼쪽에 붉은 실을
묶어주고 여자는 오른쪽에 붉은 실을 묶어주었다. 실을 3일동안 풀지 않고 있으면 복이 온다는
민간속설이 있다고 한다.???

중국서커스를 구경했는데, 서커스하는 사람들이 고무줄처럼 여러 가지 묘기를 부리는데,
약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더운 날씨로 하루를 마감하며, 호텔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

둘째 날은 여불위의 아들 진시황이 만들었다는 만리장성을 가는 날이었다.
처음에 명나라 지하궁전 명13릉을 구경했는데, 지하는 대리석으로 만들어 정말 시원했다.
명나라 황제와 두 황후가 묻혀있다는 릉인데, 정말 대규모로 사람이 동원되었을 듯하다.
지하 깊이는 27미터라고 한다. 첫날 자금성은 열대지방이라고 하면 이곳은 완전히 북극이라고
하면 될까?

만리장성을 가게 되었는데 가도 가도 장성은 안보였다. 실제로 북경의 서북부를 제외하고
산이라고 볼 수 있는 산이 없었다. 산 가까이 가도 만리장성이 안 보여서 도대체 달에서
혹은 우주에서 만리장성이 보인다고 하는데, 아마도 거짓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쨌든 산 가까이 가야 만리장성이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가는데 약간은 무서웠다(^^;)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위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진시황 때는 토성이었고 명나라 때 벽돌로 쌓았다고 한다. 원나라후에 명나라를
만들어서 원나라 몽고족을 두려워해서 말이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이로 성을 쌓았고 주로
북쪽방면에 활을 쏠 수 있는 포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만리장성에서 팔달령 장성과 모전욕 장성, 사마대 장성이 제일 유명하다고 하는데,
우리가 간 곳은 팔달령 장성으로 만리장성중 가장 지세가 험하고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계단도 있지만, 비스듬히 올라가는 길이 있기도 하는데 눈이나 비가 오면 위험할 듯
했다. 이 장성을 만드느라 얼마나 많은 민초가 희생되었을까? 진시황의 막강한 권력을
느낄 수 있는 장성이었다. 팔달령 장성 끝에는 이런 말이 써있다고 한다.
만리장성을 오르지 않고 어찌 남아라고 할 수 있나?
여자는 오르면 안될 것 같다. 남 여가 같이 오르면 모두 남자가 되어 버릴 테니까^^;

용경협은 괜찮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강택민시절에 개발되었다고 한다.
댐으로 물을 막아 인공호수를 만들어서 호수를 유람하는 것인데, 대체로 장가계의 보봉호보다는
많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오후에 발 맛사지를 받았는데, 만리장성을 오래 걸어서 상당히 시원한 편이었다.

셋째 날은 명청대 황제들이 해달바람 등 자연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천단 공원을 관람했는데,
우리나라 올림픽공원과 파고다 공원을 합해 놓은 것이라 보면 된다. 물로 붓글씨 쓰는 사람,
댄스를 하는 사람 제기차기 배드민턴 등 다양한 중국인들을 볼 수 있었다.
천단공원에서 한 건물은 회음벽이라고 해서 소리가 잘 반사되도록 만들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하늘에 소리가 잘 닿게 하기 위해서 만들지 않았나 보인다.

그다음에 티벳 불교사원인 옹화궁을 보았는데 티벳 승려들이 있었고, 우리나라의 절과 비슷했다.

서태후의 거처인 이화원이라는 정원을 보러갔다. 오늘의 최대하일라이트라 보면 된다.
철의 여인 서태후가 해군에서 신형 군함을 구입하기 위한 공금을 빼어서 이화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예전에 청의원을 복원해서 이화원으로 바꾼 것임. 이화원의 4분의 3은 곤명호라고 하는 호수인데,
절경은 그야말로 아주 뛰어나다.

그런데 이화원 입구에 당도하자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서태후의 거처인 이화원 곤명호를 제대로
못 보았다. 아쉬움을 뒤로 한채 돌아서는데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 번에 다시 한번 와야 겠다는 생각 뿐이다.
서태후가 정치에 머리가 아플 때 찌는 듯한 더위에 곤명호에서 유람하면서 시원한 바람에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배를 타고 유람했을 것이다.

이번 여행은 북경의 변화무쌍한 날씨(덥고 시원하고 폭우 쏟아지고)와 예전 명청시대의 유적과
변화 발전하는 중국의 모습을 통해 배울 점이 많았다.
다만, 폭우 때문에 이화원의 빼어난 절경을 자세히 못 본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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