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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떠날 수 없음을 떠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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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은 한 권의 책이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책의 한 페이지만을 보는 것과 같다."

  여행은 정형화된 일상의 틀에서 벗어남이며, 적당한 긴장과 설렘을 살포시 즈려밟고 가는 여정이다.

책을 통해서 읽고 이야기를 들어도 백문이 不如一見이라는 말처럼 실제로 보는 것만 같지 않다.

물론 실제로 보았을 때 실망감도 있을 수 있지만, 인생사 짧은 시절에 많은 것을 이루어 보지 못하고,

나이 먹어 후회할 일도 많지만, 결코 여행에 있어선 아쉬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작열 하는 태양도 무더운 열대야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한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해진 9월 어느 날 낯선 미지의 세계를 찾아 길을 떠난다.

갈 수 없는 길과 가야할 길은 겹쳐져 있다.

내가 가고자 하면 가야할 길이 되고, 마음을 바꾸면 갈 수 없는 길이다.

떠날 수 없음을 떠나는 것이 곧 여행이다.

예전에 오랜 세월 평안하라고 해서 長安이라 지은 도시는 이제는 서쪽이 평안하라고

이름 붙여 西安이라 불리 운다.

 인간세상도 개혁이, 혁신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듯이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는 것만이 生存하고,

또 역사에 남는 것이다. 여불위의 사생아가 진시황이 될 줄, 인류 역사상 최초의 황제가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OZ라는 암호명을 지닌 비행기를 타고 저녁 늦게 도착한 서안,

며칠 전부터 간간이 비가 온다던 서안도 여행 매니아의 방문을 반기는지, 선선한 가을 날씨의

바람을 보내 주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역사의 현장으로 가는 모험은 여행의 즐거움 이라고

할  수 있다. 삼천 년 전의 역사에서 배울 것을 모르는 자는

아는 것이 없이 암흑 속에 누워 있는 것과 같다.

그 날 그 날을 살아간다 하더라도.(괴테)

중국의 3천년을 보려면 시안으로 가라는 말처럼 더 넓은 세상을 보려고,

진시황과 당태종 이세민과 당현종과 양귀비의 체취가 남아있는 역사의 장소인 장안으로


무사히 안착했다.

 첫날 숙소가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이번 여행은 느긋하고 오랫동안 편안한[長安] 여행인데,

이름이 皇后호텔로 皇后와 같이 들어가야 하는데, 나의 皇后가 아직 없는 관계로 아쉬움이

좀 남는다. ^^;

  다음 날 화창한 날씨와 더불어, 서안의 활기참이 깨어나는 아침 역사의 바다를 버스를 타고,

航海를 시작했다. 처음 간 곳은 비림이라는 곳으로 비석이 숲처럼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비석들은 역대 명필의 글을 새긴 비석인데 약 1,000 여 개가 있었다. 처음에 우리 나라

에밀레종처럼 생긴 거대한 종이 놓여 있었는데,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건물 기둥은 중국인이

붉은 색을 좋아해서인지 붉은 색 기둥과 검은 벽돌 건물의 조화가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비림이라고 쓰여진 중앙건물에 큰 비석이 세월의 풍상을 견디지 못하고 쇠틀에 묶여서

놓여 있는데, 글씨가 명필이었다. 그러나, 모양과 크기는 만주벌판을 호령했던 광개토대제의

비에는 미치지 못했다. 여러 가지 비석들이 초서 예서 행서체 등 다양하게 새겨져 있었다.

 제일 안쪽에 탁본을 뜨는 곳이 있는데, 흰 종이를 비에 붙이고 검은 먹을 둥그런 판에 칠하고,

가볍게 터치하면서 탁본을 뜨고 있는데, 그 탁본은 우리 나라 돈으로 3 만원에서 5 만원 정도에

판매되고 있었다. 탁본 뜨는 비석이 표면이 매끄러운 것을 보니 모조품인 것 같았다.

중국인의 상술은 역시 대단했다.


 그 다음은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의 전설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화청지로 향했다.

화청지는 온천으로도 유명하다. 입구에 복스럽고 풍만한 여인들의 부조가 조각되어 있었다.

양귀비와 시녀들인지, 양귀비를 여러 명 조각해 놓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양귀비는 풍만한 미인이었을 것이다. 그 앞에는 원형의 연꽃 무늬 모양이 바닥에 입체적으로

커다랗게 조각되어 있었는데 예전에 만든 것인지, 최근에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화청지 연못은 시원한 분수가 가운데서 치솟고, 못 주변에 여러 가지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서 당현종과 양귀비의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했다 . 화청지는 주변의 경관과


잘 어울리며 여성스러움을 강렬하게 발산하고 있었다. 그 뒤로 연못이 또 있는데 이 곳에선

저녁에 양귀비쇼를 한다고 한다. 상당히 큰 宮인데 그 뒤로 거대한 양귀비상이 하얗게 서

있었다. 동양의 비너스마냥 풍만한 육체를 재현해 놓았는데, 당시 양귀비는 키가 160CM

정도라고 하는데, 그 당시엔 대단히 큰 키였다고 한다. 양귀비상의 허리부분에 손을 대고

사진을 찍는데, 조각이 너무나 섬세해서 살아 있는 사람을 만지는  착각에 빠졌다. ^^;

태자의 부인으로 왔다가 황제의 부인이 된 비운의 주인공, 안녹산의 난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양귀비, 황청궁을 보면 양귀비가 당 현종을 녹인 요부가 아닐까 생각된다.

백거이의 '장한가'의 한 대목을 살펴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 언니들과 오빠들도 모두 제후의 서열,
  집안에도 찬란하게 서광이 비치구나.
  마침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아들보다 딸 낳기를 더 소망했다네.'

그 후, 양귀비가 사용했던 목욕탕을 구경했다. 연꽃무늬처럼 생긴 둥근 탕인데,

지금은 물은 없고 비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지 동전이 깨알 같이

탕 안에 던져져 있었다. 큰 직사각형의 당 현종의 탕을 보고, 위쪽으로 올라 온천이 흘러 들어

오는 곳에 보니  그 곳에는 동전과 지폐가 잠겨 있는데,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후 온천물이 나오는 연꽃모양의 세면대는 돈을 받고, 입장시키는 것 같았다. 그 곳에

들어가 손을 씻고, 얼굴에 온천수를 발랐다.

 다음은 병마용으로 유명한 진용박물관으로 가게 되었는데, 입구는 공중전화 카드 같은 표를

구입해서 지하철처럼 투입하면 들어가는 시스템이었다. 입구를 지나서 넓고 초록이 물든

공원을 한참 지나자 병마용갱 박물관이 둥그런 지붕을 보이면서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초록의

잔디가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고, 햇살은 따뜻했다. 병마용갱 입구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바다여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인파를 헤치고 앞에 가서 보니 병마용의 바다였다.

2200여 년 전의 사람들이 살아서 전투대형으로 있는 것처럼 위용이 느껴졌다. 책에서 보던

것을 직접 보게 되는 감동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우리가 처음 박하사탕을 입안에서 녹여 먹던

그런 하얀 화한 기분이랄까? 야구를 좋아하는 필자가 야구를 빗대어서 이야기 하자면

야구에서 야구의 꽃은 홈런이라고 하는데, 야구에서 아마 홈런이 없었다면 야구가 지금처럼

인기있는 스포츠가 되지 못하였으리라 생각한다. 무더운 여름 푸른 하늘을 힘차게 가르고

날아가는 홈런의 시원한 청량감은 야구팬들은 아마도 잘 알 것이다. 그것도 역전홈런이라면

더더욱 시원한 청량감을 우리에게 선사할 것이다. 9회말 2사후 역전 만루 홈런처럼,

인생역전이라는 어느 복권회사에서 광고문구를 사용하던데, 그랜드슬램이 바로 만루홈런을

지칭한다. 병마용을 처음 대면한 감동은  박하사탕이나, 야구에서 홈런같은 시원한 청량감

같은 것이라 설명할 수 있겠다. 우리도 인생에서 그랜드슬램을 쏘아 올려야 한다.

1974년 우물을 파던 한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 병마용은 몸은

채색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은 그 많은 병마용이 왜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나무로 창들을 만들었는데, 세월의 흐름 속에

산화되었다고 보면 된다. 1호, 2호, 3호 유물을 모두 보고 밖으로 나오자, 어둡던 실내에

비해서 바깥은 파아란 하늘과 초록의 들판과 더불어 햇살이 비추어 밝아졌다.

그 후 진시황릉을 가게 되었는데, 진시황릉은 조그만 산이라고 보면된다. 정상까지 가는

수직계단은 높지 않았는데, 시원스럽게 하늘로 향하듯이 있었다. 가는 입구엔 옛날 진나라 때

옷을 입고, 제사를 지내고,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는데, 가락이 웅장하고,

시원해서 듣기 좋았다. 계단을 오르는 중간에 양 옆 숲에는 석류나무가 많이 있었다.

양귀비가 좋아했다던 석류나무라고 한다. 드디어 정상에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주변 경관이 한 눈에 들어왔다. 두보의 詩중에 '태산에 올라 뭇 산이 작음을 반드시 보리라'

라는 구절처럼  호연지기가 느껴지고 세상사 모든 일이 작게만 느껴졌다.

정상에서 내려와 천하제일릉이라고 쓰인 바위에서 사진 한 컷!

 

 오늘 하루 秦나라시대 진시황릉, 병마용, 唐나라시대 당현종과 양귀비의 전설적 사랑, 장안의

명필의 글을 새긴 비문 등 역사의 현장에서 서안 아니 장안의 진면목을 보니 이제 장안에서

더 이상 볼 것이 없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다음 날 흥경공원에 갔다. 공원은 호수와 더불어 당나라 현종이 국사를 보던 건축물이 있었다.

계단중앙에는 용과 봉황이 역동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공원에는 운동하는 사람, 춤추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무술을 하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들이

공원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대체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호숫가에는 노인이

악보를 보면서 악기를 불면서 지나간 세월을 아쉬워하는 듯한 노래를 연주하고 있었다.

올림픽 공원처럼 아름답게 잘 꾸며 놓은 것 같았다. 햇살은 부드럽게 내리쬐고, 간간이

미풍이 불어서 삶의 여유와 자연의 아름다움과 권력의 무상을 보여 주고 있었다.

잠시 쉬다가 서안 역사 박물관으로 갔는데, 외관은 우람하고 웅장한 건축물이었다.

실내에는 선사시대, 진, 한, 위진남북조, 당, 송, 명, 청 시대의 유물들이 있었다.

예전에 장개석이 중국의 보물을 대부분 가지고 가서인지 유물들이 조잡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별로 볼만한 것이 없었다. 대만의 고궁박물관, 러시아의 에르미따쥐박물관 등과 비교하면

박물관이라고 이름붙이기도 미안할 정도라고 보면된다. 단지 展示室일뿐이다. 서안전시실.......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이 어머니인 문덕 왕후를 기리기 위해 지은 자은사 내에 대형탑인

대안탑이 있었다.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상과 경전을 보호하기 위해 탑을 건립했다고

한다. 7층까지 힘겹게 올라 위에서 내려다 보니 장안시내가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 당시에 최고의 도시인 장안은 도로가 동서남북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어 당나라시대의

영화를 보여 주었다. 내려와서 현장법사와 같은 조각에서 사진 한 컷을 찍었다. 그 옛날

현장법사와 현재의 내가 교감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현장법사를 모델로 하여 손오공을


만들어 삼장법사가 나온다고 보면 된다.

  저녁에 대당 부용원을 가게 되었다. 부용원이란 연꽃정원이라는 의미인데, 인공적으로

당나라시대의 건축양식을 현대에 재현해 놓은 놀이공원이라고 보면된다. 휘황 찬란한

불빛으로 건물들을 밝혀 두어 당나라 시대 연회가 시작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나라 경북궁 근정전처럼 만든 건축물이 호수에 비추어 아름다움을 한 껏 보여 주었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부용교를 가볍게 건너면서 바라본 호수 풍경은 한 폭은 잔잔한 풍경을

아름답게 보여 주었다. 열차를 타고 부용원주변을 둘러보는데, 양귀비의 하이얀 조각상들이

다양하게 있었다. 호수 가운데 섬까지 연결된 도로는 호수에 있는 고기를 구경하기도 하고,

고기들에게 밥을 던져 줄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잠시 후 어둠이 내리자 레이져 쇼가

시작되었다. 호숫가에 형형색색의 레이져가 비추고, 폭죽이 발사되고, 분수에서 물이 분출하고,

불이 튀어 나오고, 애니매이션이 공중에 투사되어서, 한 여름밤의 멋진 광경을 연출시키고

있었다. 마지막에 빨간 분수 한줄기가 하늘높이 치솟으면서 막을 내렸다.

아마도 중국은 하나다라는 정치적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은 소수민족이 인구에 비해 엄청나게 넓은 땅을 차지하기에 소수민족을 포섭하지 않고는

넓은 땅과 천연자원을 차지할 수 없기에 정치적으로 포용정책을 취하고 있다.

 저녁식사는 교자연을 먹었는데, 양귀비가 즐겨 먹었다고 한다. 열네 다섯 가지 다양한 만두가

나오는 코스요리인데, 마지막에 새끼손가락 손톱의 사분의 일정도 되는 크기의 만두가 특이했다.

볼 것없는 서안전시관, 7층 정도의 거대한 대안탑, 놀이공원인 부용원의 레이져 쇼를 보았는데,


대안탑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다음 날 모택동의 근거지였던 팔로군 기념관을 갔다 나오는 길에 독일에 사는 교포가

서안으로 배낭여행을 왔다고 한다. 나이는 50대 후반 정도인데 참 대단한 여성인 것 같다.

한비야를 직접 대면한 것 같았다. 그 다음 진시황의 왕궁 터와 아방궁 유적지를 보러 떠났다.

진시황의 왕궁은 입구에서부터 거대한 입상과 더불어 엄청나게 높은 건물이 서 있었다.

중국영화에서 처럼  엄청나게 큰 궁이었다. 예전에 관료들이 계단아래 모두 도열해 있었을 것을

상상하니 그 위용은 왕이 아니라 인류최초의 황제라 칭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궁 뒤쪽으로 호수가 있는데 그 중앙 부근에 작은 섬이 있는데, 그 섬에 궁을 하나 지어 놓아

그 궁이 아방궁이라고 하는데 생각보다 작았다.

  그 다음 명나라 시대 성벽을 구경 갔다. 실제로 성벽을 보니 완전히 철옹성이었다.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높이가 만리장성하고는 비교가 안되게 높았다.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는 몽고족을 두려워해 말이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게 엄청난 높이로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두께는 밑부분이 대략 50m 정도는 되보였다. 어떤 무기로도

뚫기 어려웠다. 성벽 위에 올라 보니 도로가 만리장성 도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버스가 2대가 교차함이 없이 지나갈 정도로 넓었다. 장안을 보호하기 위해 높고 넓게

사각형으로 둘러싼 웅장하고 견고한 철옹성이었다. 그러나, 만주족에 의해 멸망당한다.

아무리 철옹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분에 의해서.......

  마지막으로 우리 나라 명동같은 종루광장과 명나라 시대 재상이었던 고씨의

은퇴한 후의 저택인 고씨장원을 가게 되었는데,집이 팔십여 칸으로 이루어진 대저택이었다.

이러한 대저택이 청나라와 중국의 문화혁명시절에 어떻게 살아 남았을까?

아마도 복원하지 않았을까 생각되지만 상당히 보존이 잘 되어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우리 나라에서 아무리 훌륭한 정부관료나 기업가라고 하더라도

아마 이런 집에 살았다가는 인터넷이나 신문 등을 통한 魔女사냥으로 목숨(?)을

보존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국인의 떼쓰는 문화도 빨리 버려야 한다.


차량 운전시 접촉 사고가 나면 목소리만 크면 된다는 사고방식,비합리적인 사고방식,

어떤 조직에서 직원이 잘못하면 조직의 장이 옷을 벗어야 하는 이상한 나라,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는 나라 ,한국

잘못은 잘못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조직의 장은 제도를 고쳐 그러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까 생각된다.

우리들은 우리 후손들에겐 잘못된 문화 유산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努力해야 한다.

국민들이 의식을 개혁하지 않으면 선진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말 처럼 '꿈속의 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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