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시아

참을 수 없는 여행의 즐거움

728x90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 우물 안 개구리는 큰 바다를 알지 못한다 )
 
  님을 만날 날을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리듯
 어린 시절 소풍가기 전부터 그 날을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리듯
 여행을 갈 날을 기다리는 행복도 여행의 즐거움 중에 한가지 라고 볼 수 있다.
 
 봄의 도시 곤명과 만년설로 유명한 여강의 옥룡설산이 이번 여행에서
 오랜 세월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태후가 북경의 이화원을 곤명호를 보고 조경했다는데,
 더운 날에  곤명호의 푸른 호수를 보면
 이 세상의 더위는 모두 소리없이 사라진다.
 
 싱그러운 햇살과 신선한 바람에 전해오는 아름다운 꽃들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봄
 
  계절의 변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지만 봄은 늘 우리의 곁으로
 항상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새해 새봄이 다가오면 언제나 새로운 땅과 새로운 장소를 찾아 오늘도 떠난다.
 떠남은 인간의 本性일까?
 
 여행은 한 인간의 사유의 영역을 넓히고, 공간을 넓히고, 많은 사람을 만나게 하고,
변화의 출발점이 되게 한다.
 
  여행은  조물주가 인간에게 준 천혜의 선물이다.
떠남은 혼탁과 선과악의 대립, 치열한 경쟁 속에서 헤매는
인간의 영혼을 맑고 밝게 정화 해주는 명약이다.
 
  여행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사고의 영역을 무한대로 확장하게 한다.
떠남은 싯다르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세상의 중심은 나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로마인이 지향했던 세계인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가게 한다.
 
  여행이란 삶의 수평선을 뛰어 넘어,새로운 세계에 도달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곤명이란 곳을 여러 해 전부터 갈 예정이었지만, 여강이란 목적지가 이처럼 흥분되고,
호기심을 유발 하는 곳 일지는 미처 꿈꾸지 못했다.
 
 장미처럼 뜨겁고
 갈대처럼 자유롭고
 물처럼 유연한
 삶을 살기 위해선 자주 떠나야 한다.
 
 여행을 통해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여행을 통해 미래를 꿈꿔라! 미래를 상상하라! 미래를 기대하라! 미래를 즐겨라!
 미래가 지금 당신 눈앞에 펼쳐진다.
 당신이 생각하던 미래. 그 모든 것이 곧 현실이 된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인생을 그리는 화가이다.
 
 고통의 침대에서
 여행을 꿈꾸는 자들만이
 인생의 찬란한 태양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삶에 있어서, 메슬로우의 욕구계층이론의 계단을
  한 단계 높은 단계로
  뛰어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일상사와 스트레스에서의 일탈이자 탈출이 바로 여행이다.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가볍게 훌쩍 떠나는 것이다.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것은 여행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일의 연장일 뿐이다.
  기회가 오면 떠나라. 그래서 떠남의 달콤하고 황홀한 체험을 하라.
  평상시에 잠들어 있던 감정과 감각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것이 떠남이다.
  태초 인간의 본성과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여행은 인생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생명력이 충만한 자연의 위대한 힘을 느껴라.
  자! 잃어버린 나를 찾아  꿈처럼 달콤한 여행을 떠나자!
 
  2008년 새해 들어 처음으로 떠나는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봄의 도시라 불리는
곤명이었다. 늦은 오후 짐을 꾸리고 여유있게 공항버스에 몸을 실었다. 후배는 상해를
가족과 장모와 같이 간다고 하는데, 중국을 처음가서 그런지 무척 일찍 나온 것 같았다.
먼저 오후 7시 비행기로 후배가족은 상해를 향해 떠났다.
 
  공항에서 잘생기고 키 큰 가이드를 만나서 우리 일행들은 중국의 서남부 운남성을 향해
한국을 떠났다. 운남성의 수도가 곤명인데 고도가 1895m로 온화한 날씨 때문에 春城이라고
불린다.기후가 쾌청하고 온난하다. 새벽에 공항에 도착하여,5성급 호텔에서 짐을 풀었는데,
방이 넓고 쾌적하고 좋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국내선을 타고 대리라는 도시로 출발했다.
대리는 백족이라는 소수민족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도시이다.
백족이 숭상하는 산은 창산이라는 산인데 높이가 3122m가 된다.
창산은 잣나무가 많다고 한다.
백족은 남자는 평생 6가지만 할 줄 알면 된다고 한다. 차를 마실 줄 알고, 술을 마실 줄 알고,
그림을 그릴 줄 알고,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도박을 할 줄 알고, 손님을 접대하면 된다고
한다. 모든 것은 여자가 다한 다고 보면 된다.
 
 백족은 흰 색을 숭상하고 집 벽을 하얗게 칠을 한다. 그 벽에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대리국이라는 나라를 만들었으나, 원나라에 의해 멸망당한다.
대리의 관광포인트는 4가지이다.
風花雪月이다. 풍이란 대리라는 도시는 바람이 많이 분다.
화란 꽃이 많이 피지만 그 중에서도 유채꽃이 특히 많다.
설이란 백족이 숭상하는 창산에 쌓인 눈을 이야기 한다.
월이란 이해라는 호수에 비친 달을 이야기 한다.
대리의 핵심은 풍화설월로 요약할 수 있다.
백족은 우리 나라 사람과 음식이나 생활습관이 비슷하다고 한다.
옛날 고구려 멸망시에 수 만명이 포로로 중국에 잡혀 갔는데, 그 후손이라는 說도 있다고 한다.
 
 먼저 사람의 귀와 같이 생겼고, 바다와 같다고 해서 이해로 불리는 호수에서 유람선을
타게 되었다. 파란 하늘, 흰 구름, 저 멀리 창산에 쌓인 흰 눈,따뜻한 햇빛이 비추는
파란 바다와 같은 잔잔한 호수면,바람이 세게 불고 있었다. 바람만 없다면 서호유람과
비슷할 듯 한데, 바람이 많이 불었다.
 
 유람선에 하선하여 白族이 숭상하는 창산에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게 되었다.
창산에 올라 대리시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니, 대리고성과
삼층탑 등이 보였다.아주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창산에 가면 약수터가 있는데, 1잔을 먹으면 1천년을 살고, 2잔을 마시면 2천년을 살고,
3잔째는 3천년을 살고, 4잔째는 설사를 한다고 한다. 난 한 잔만 마셨다.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와서 약수를 마시고 천년을 둘이서 같이 해로하고 싶다.
 
 내려오는 길에 계단에 福과 財라는 글자에 수많은 사람들이 만져서 번들번들 해져 있었다.
모든 인간들의 소망이 福과 財가 아닐까?
 맑은 하늘아래 이해와 대리고성주위에 집들이 밀집해 있는 도시를 내려다 보며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다. 대리석이라는 이름도 대리에서 대리석이 많이 나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대리국의 도읍지였을 때 축성되었던 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대리고성에 갔다.
입구는 그 옛날 대리국으로 가는 과거의 입구였다. 성의 입구에는 大理라는 이름이 황금색으로
쓰여 있었다. 옛날 원나라에 멸망하기 전까지 대리국의 318년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었다.
우리 나라 인사동처럼 상점과 카페가 자리잡고 있었다. 주변으로 수로에 맑은 물이 흐르고,
수로 주변에 버들가지가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있었다. 물 속에는 붉은 색의 물고기가 놀고,
멀리 창산의 정상에 흰 눈이 보이고, 밝고 따뜻한 햇살아래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흥겨운
음악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행복한 오후의 한 나절이었다.
 
 백족마을의 삼도차쇼를 하는 곳으로 갔는데, 바람이 정말 많이 불었다.
백족은 흰색을 숭상한다고 한다. 백족마을에서 엄할머니집에 가게 되었다. 백족은 남자보다
여자가 가정의 모든 일을 하지만 권한도 대부분 가지고 있다. 엄청난 집(대략 100칸)이었지만
문화혁명때 정부에 빼앗겨  지금은 그 후손들이 관리만 한다고 한다. 저택의 정면은 큰 돌로
막아 바람을 방어하고, 태양빛을 받아 집안에 빛이 들어오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1층은 대리석과 같은 돌로 튼튼하게 지었고, 2층은 나무를 사용해서 지었다고 한다.
2층을 다니면 나무라서 소리가 나게 되는데, 도둑을 방지하기 위한 것도 있다고 한다.
 
백족의 삼도차쇼는 인생의 세가지 맛, 단맛 쓴맛, 복합적인 맛이 담긴 차 세 잔을 마시며
백족의 공연을 감상하는 것인데, 머리에는 흰색의 모자를 쓰고, 옷은 붉은색의 화려한 색을
많이 쓴 의상이었다.모자 끝에는 흰색의 끈들이 많이 달려 있었다.
결혼식때 신부를 좋아하는 만큼 주변 하객들이 꼬집어 주는데, 퍼렇게 멍이 든다고 한다.
신랑은 꼬집지 못하게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다.
 
 대리는 바람이 많은 도시이다. 바람과 같이 이해와 창산 대리고성 삼도차쇼를 보았다.
백족은 흰색과 태양을 좋아하는 민족으로 하루만에 대리국을 여행했지만 즐거운 여행이었다.
 
 다음 목적지인 여강[리장]으로 떠났다. 호텔은 빌라식으로 지은 현대식 건물인데,
난방이 잘 되어 있지 않아 몹시 추웠다. 1층에 관리인이 있어 필요한 요구 사항을
잘 들어 주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 커피를 마시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나시족[납서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강에서 눈을 떴다.
여강은 나시족의 도시다. 나시족은 백족과 달리 나라를 형성하지 못했다.
나시족은 몽골족의 후손이라고 보면된다. 성을 쓰지 않다가 청나라에서 木씨성을 하사받아
나시족 지배층은 목씨 성을 쓰고 나머지 피지배층은 和씨를 써서 목씨와 화씨만 있다고
보면 된다.그전에는 아버지 이름에서 한 글자를 사용하여 이름을 만들고, 그 아들의 이름에서
또 한 글자를 사용하여 손자이름을 만드는 식이었다. 일종의 꼬리 잇기라 보면된다.
나시족은 매우 영특한 민족이다. 전 세계 인구가 30만 밖에 안되지만
자기민족의 독특한 문자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다. 우리 나라 민족이 한글을 쓰듯이
상형문자와 비슷한 문자라고 보면된다. 대부분의 민족이 한족에 동화되어 지금은
거의 멸종했듯이 어떤 민족이나 나라와 문자를 가지고 있으면 그 민족은 영원하다고 본다.
민족과 국가와 문자와 문화가 중요한 이유이다. 우리 나라는 민족과 국가는 어느 정도
강하다고 볼 수 있지만 문자와 문화가 가볍게 여겨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향후 천 년 후에도 대한민국과 한민족과 한글과 한민족문화가 유지될 수 있을지
그 것은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과 지금의 국가 운영자에 달려 있다고 본다.
나중에 중국이나 미국에 흡수되어 찬란했던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게 되고,
피가 섞여 한민족이 멸망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한글과 문화마저 상실할 지도 모를 일이다.
 
 대리의 관광포인트는 풍화설월이라면 여강의 관광포인트는 山水城이다.
나시족이 숭상하는 옥룡설산의 만년설이 산이라면,
물이라면 옥룡설산에서 땅속으로 흘러 고성으로 흐르는 옥수채 등이다.
성은 여강고성을 이야기 한다.
나시족은 당나라 도교와 티벳의 라마교의 영향을 받았다.
나시족은 중국의 한족과 티벳사이의 완충지역인 2400m 고산지역 운남성에 자리하고 있다.
한족과 티벳 장족의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1만명 밖에 안되는 인구로
우리 나라 남한의 4배의 영토를 지배하고 자기만의 독특한 문자를 쓴 매우 영특한 민족이다.
다만 자기 만의 나라를 만들지 못한 것이 약점이라 볼 수 있다.
 
 
나시족은 남자는 공부와 집짓기가 주된 일이었다. 모든 일은 여자가 다했다. 여자는 노동 등
모든 일을 하였다. 나시족에서 미인은 몸이 튼튼하고 피부가 시커먼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로 보면 남자와 여자의 일이 바뀌었다고 보면 된다. 나시족은 평생에 세 번 목욕을
한다고 한다. 태어나서 혼인 시 죽을 때라고 한다.고산지대는 자주 목욕을 하면 저항력이 약해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먼저 이른 아침에 흑룡담이라는 곳을 가게 되었다. 옥룡설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흘러 들어
맑게 형성된 호수이다. 호수에는 산과 정자와 다리가 비추어 한 폭의 멋진 산수화를 펼쳐놓은
듯 했다. 연못에는 수 많은 고기들이 유유자적 놀고 있었다.  정자 뒤로는 멀리 옥룡설산의
하얀 자태가 보였다.  하늘의 구름이 호수에 비추어 호수에서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다음으로 백사벽화를 보러 갔다. 200년이 넘게 벽화를 보존하고 있었다. 입구 벽에는
나시족들이 쓰는 상형문자가 쓰여져 있었다. 사랑, 학습, 혼례, 부부 등 여러 가지가
그림처럼 그려져 있었다. 백사벽화는 건물 안에 들어 있는데, 그 입구엔 나무가 벼락을
맞아서 죽지 않고 두 갈래로 갈라져 자라고  있었다. 백사벽화는 여러 가지 종교의 신들을 그려 놓았다.
나시족이 1만명으로 넓은 땅을 지배해야 했기에 포용정책을 사용한 흔적이라 볼 수 있다.
나시족은 벽을 제일 밑 부분에는 돌을 사용하고 그 위에 벽돌을 사용하여 집을 지었다.
운남성 지역이 지진이 많이 나기에 이런 식으로 집을 짓는다고 한다. 그리고 집들이 나무로
지어서 화재의 위험이 많아서  지붕 중앙 밑 부분에 화기를 막기 위해 물고기를 상징하는
나무를 붙여 놓았고 집 주변에 수로를 만들어 놓았다. 집 대문 위에  고양이와 비슷한 동물
모양을 장식해 놓았는데 앞을 보고 뒤쪽은 엉덩이 부분이 집안으로 오게 설치해 두었다.
밖에 재물을 많이 먹어서 집안으로 재물을 배설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시족은 동파문화라는 것이 있는데 동파는 지혜를 의미한다고 한다.
옥수채가 나시족의 동파문화원류라고 한다. 물은 비단처럼 떨어지는 폭포를 이루고 있었다.
옥수채는 일종의 작은 구채구라고 할 수 있다. 호수 속에는 송어가 많이 살고 있었다.
옥수채 제일 위 호수에는 구렁이가 옥수물을 마시고 득도해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어서 금색으로 거대한 동상이 서 있는데, 그 만큼
물이 깨끗하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이 물을 마시면 건강하고 장수한다고 한다.
한 모금 물을 마셨다. 옥수채에서 채는 마을이라는 뜻이다.나시족은 남근을 숭상한다고 한다.
굴뚝 모양으로 검은색 돌을 사용하여 거대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남근석에는 파란색, 흰색,
빨간색,노랑색,초록색의 띠가 둘러 쌓여 있다. 파란색은 하늘, 흰색은 구름,빨간색은 인간의 피,
노랑색은 화합,초록색은 자연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아래쪽 나시족의 전통마을인 옥수채를 구경했다. 야크[모우]와 거주하는 집과 술을 담궈
보관하는 집과 종이 만드는 집 등이 있었다.
드디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해발 5596m의 옥룡설산을 보러 가게 되었다. 수 많은 식물과
만년설로 유명하고 지금까지 아무도 그 정상을 정복하지 못한 범접하지 못하는 산이다.
나시족 설화에는 이 산이 정복되는 날엔 나시족이 멸망한다고 한다. 옥룡설산중에서
모우평쪽으로 가는 리프트를 타기 위해서 갔다. 무공해 버스를 타고 40여분을 산을 오르니
머리가 고산증세로 인해서 멍한 느낌이 든다. 그래도 구채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나시족들이 신성시하는 옥룡설산을 보기위해서 드디어 버스로 케이블카 쪽까지 갔다. 옥룡설산은
3군데 케이블카로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우리가 오르려고 하는 모우평쪽을 제외하곤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모두 운행이 정지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우리가 도착하자 나시족의 신들이
노여워 했는지 모우평쪽 케이블카도 정지되어 버렸다. 옥룡설산에는 황금빛 원숭이가 있다고
한다. 600m에서 4200m 높이에 수 많은 식물들이 서식하는 식물왕국이기도 하다.
장예모 감독의 印象麗江이라는 공연도 옥룡설산에서 해발 3100m에서 공연한다고 한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40분을 천연버스로 내려오는 데, 일행들도 모두 아쉬워하는 모습이었다.
신은 자연의 날씨를 마음대로 조정해서 인간의 작은 지혜와 욕심을 비웃는 것 같다.
내려오는 길에 설산을 멀리서 버스에서 나마 바라보는 데 설산은 의연하게 아직도 그 자리에
말없이 있었다. 지구 온난화로 한 30년 지나면 아마도 눈이 녹아 설산을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오후에 여강고성을 갔다. 여강고성은 유네스코 지정한 문화명승지라고 한다.
명나라 청나라시대 가옥들이 늘어서 아늑하고 운치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데,
대리고성보다 더 화려하고 사람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다.
여강은 서양사람들도 많이 오는 관광지라고 한다.
나시족은 몸통쪽에 끈을 엑스자로 매는데 결혼한 사람은 끈을 꼬아서 매고,처녀는
끈을 꼬지 않고 매어서 구별한다고 한다.


 여강고성입구에는 거대한 물레방아가 돌면서 우리를 반겨 주었다.
여강고성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그 시냇물에 붉은색의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옆 가게에는 붉은 등을 줄줄이 매달아 놓고, 버들가지가 축축 늘어져 있어서 운치가 그만이었다.
음악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활기 차게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어서 그 옛날 거리로 온 것 같았다.
중국의 많은 영화가 이 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대리고성보다 몇 수 위인 것 같다.
사방가라는 중심지엔 공연을 하기도 하는 것 같다. 일행과 같이 여강고성의 한 카페에 들어가
녹차와 신라면을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었다.이 가게는 한국인 여성이 여강으로 여행을 왔는데,
나시족 남자가 반해서 둘이 결혼해서 한국인 여성이 사장으로 있는 가게(사쿠라 카페)라고 한다.
여사장의 고향은 부산이라고 한다. 신라면과 김치를 먹으면서 여강의 정취를 느끼며
여강의 하루는 저물어 갔다.
 
 곤명[쿤밍]의 호텔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곤명은 만년세월이 빚은 무지개빛 이상향이다. 곤명에서 석림으로 떠났다. 석림은 이족자치구
라고 한다. 이족은 호랑이가 조상이라고 한다. 이족은 인구가 600 만명이나 된다.
이족은 1달이 36일이고 1년은 10개월을 사용한다고 한다.
이족은 2000m 이상의 고원에 사는 민족이다. 남자를 아 허이꺼라고 부르고,
여자를 아쓰마라고 부른다. 여자들이 쓰는 모자를 보면 처녀인지 결혼한 사람인지,
할머니인지 알 수 있다. 모자에 뿔이 두 개 달려 있는데, 뿔 두 개가 다 세워져 있으면
처녀이고, 하나가 누워 있으면 결혼한 여자이고, 두 개가 다 누워져 있으면 할머니라고 한다.
 
  석림은  곤명을 대표하는 관광지이다. 대석림과 소석림으로 나뉘는데, 1100만개 이상의 석봉,
석주, 석순 등이 마치 숲처럼 우거져 있다해서 석림이라 불린다.
카르스트 지형이 해발 1900m 고원지대에 펼쳐져 있는데, 터키의 카파도키아와 비슷하다고
보면된다. 神이 돌 씨앗을 석림지역에 뿌려서 돌이 나무처럼 자라 숲을 이룬 것이 아닐까?
카르스트 지형이란 석회암 지대가 오랫동안 물에 녹아서 형성된  침식지형이라고 한다.
 
 수천만 년 전에 바다였던 곳이 지구의 융기에 의해 땅위로 솟아 올랐다고도 한다.
 
 석림 숲 사이를 걸으며 바닷속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이렇게 걸을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석림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망봉정 이라는 정자까지 엄청난 인파로 인해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며 올랐다. 그야말로 망봉정에서 바라본 풍경은 돌의 바다였다. 자연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었다.석림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멋진 풍경이었다.
그 옛날 바다였을 때 물고기들은 이 석림의 바다를 평생을 헤엄쳐
다니며 감상했을 것이다. 망봉정을 내려와서  소석림의 입구에서
거대한 연꽃이 피어 있는 호수를 구경했다.물론 연꽃도 바위로 되어있었다.
유채꽃과 초록의 잔디와 석림의 배경이 멋진 그림이 되어 있는 곳을 배경으로 사진 한 컷.
거대한 돛의 형상을 한 배 바위도 있었고, 이족의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석 바위도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강을 건너다 여자가 강물에 휩쓸려 사라져 돌이 되었다고
한다.
소석림은 대석림에 비해 아기자기하고 평지여서 구경하기에 좋았다. 날씨도 화창하고 좋았다.
 
  구향동굴로 향해서 처음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50여 미터 내려가 협곡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나룻배를 타고 노를 저어서 협곡을 구경했다. 음취협이라고 하는 데,작은 보봉호라고 볼 수 있다.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그 다음에 구향동굴 탐사를 시작했다. 구향동굴은 황룡동굴과 비슷했다. 구향동굴안에 맹어라는
눈이 없는 고기가 있었다. 빛이 없어 눈이 퇴화된 고기로 크기가 조그만 고기였다. 구향동굴입구는
태로각 협곡과도 비슷했지만 크기에 있어선 태로각이 더 웅장했다. 동굴 안에는 자웅폭포가 있는 것도
특이했다.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물줄기와 소리가 자웅을 겨루는 듯 했다.
동굴 내에 계단식 논처럼 생긴 신전이 있었다. 신기한 밭이라고 해서 이름이 신전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어쨌든 1시간 40분간의 구향동굴 탐사를 끝내고  케이블카를 타고 지상에 다시
올라왔다.
 
 이번여행에서 대리국의 백족과 여강의 나시족, 석림의 이족 등을 보았는데 대부분이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었다. 여강의 옥룡설산을 못 본 것이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워  아이 따리, 리장, 스린!

'아시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비한 비경을 찾아서!  (0) 2009.03.07
여행은 계속되어야 한다!  (0) 2009.01.27
吳나라, 宋나라 이야기  (0) 2007.09.27
떠날 수 없음을 떠나는 것  (0) 2007.09.20
잃어버린 故土를 찾아서!  (0) 2007.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