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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영원한 사랑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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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길은 누구에게나 두려움과 외로움과
 신비로움이 겹치게 된다.  떠나는 이유는 없다. 그저 떠나는 것이다. 꿈을 꾸듯이,
 꿈 같은 여행을, 꿈속을 걸어 가듯이, 꿈 같은 장소로 떠나는 것이다. 우리와 다른 땅에
 다른 문화와 다른 기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는 이방인이 아닌 세계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남한)보다 33배나 큰 나라 - 인도

  여행은 삶의 일부분이자 전부이다. 여행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꿈 같은 여행을 통해 자신의 지평을 무한히 넓혀 가야 한다. 아무도 밟지 않는
 겨울의 새벽 흰 눈길을 가듯이 진취적 기상으로 나아가자. 아침의 신선함과 미지의
 신비로움이 있다. 미지에서 느낄 수 있는 魅力이 있다. 생의 가장 아름다운 보석은
 여행이다. 낯선 풍경과 새로운 경험이 없다면 누가 여행을 떠나겠는가?
 여행을 통해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 여정에서 발견한 寶石을 잃지 않아야 한다.
 여행을 통해 발견한 寶石을 마음속에 간직해서 우리 인생을 찬란하게 빛나게 해야 한다.

  오늘 하루를 생각하면 어디로 떠나고 싶지 않은가?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위대함을
 느끼고 싶다면 아무 생각없이 마음을 비우고 떠나라. 떠나는 자만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면 우리의 삶도 그만큼 더 위대해진다.

  좋은 공기, 좋은 물이 아픈 몸을 회복시켜 건강해지듯이,
 좋은 생각, 행복한 느낌을 자주 접하다 보면 어느새 행복하게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좋은 여행은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아름답고 찬란한 인생으로
 만들어 가게 한다. 화려한 자연의 위대함과, 계곡의 수려함과 인간의 노력이 더해진
 문화 유산을 보면서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희망을 가지고 삶을 더 진지하고 알차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사람과는 사귀지 말라.
 발전이 없기 때문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마음을 비울 수 없어서 여행을 떠날 수
 없다. 큰 뜻을 품고 세계로 떠나자. 길 떠나는 자 그대의 앞 날에 영광이 있을 것이다!

  인도 땅에 숨겨 놓은 보물인 타지마할을 찾아서 인도를 찾았다. 간디와 타고르의 고향,
 고행길이 될 인도를 여행지로 선택하게 된 동기도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 일까?
 생과 사를 초월한 요가의 나라, 일상에서 탈출하는 여행은 언제나 즐겁다.
 "쇼생크 탈출" 영화를 보면 참 재미있다. 탈출도 일종의 여행이 아닐까?
 
  한 줄기 바람에 세상의 근심이 사라진다. 무수한 왕조가 나타났다 사라진 인도,
 그 중에서 무굴제국의 황제인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아름다운 사랑의 증표인
 타지마할이 약 370년 동안 살아 숨쉬는 나라

   공항에 도착해서 델리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삶의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사람은 가끔 여행을 통해서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 보는
 속세는 자그마한 미니어쳐에 지나지 않았다. 왜 인간은 좁은 울타리에서 아둥 바둥
 살까? 고구려 광개토대왕처럼 요동벌판을 호령하는 진취적 기상을 지닌 리더가
 나타나 고조선시대부터 우리의 영토였던 광활한 땅을 수복할 수는 없을까?


  삼국지연의에 '천하의 대세란 합쳐짐이 오래되면 반드시 분화하고, 분화가 오래되면,
  반드시 합쳐지는 법이다.' 라는 말이 나온다.
  단군의 후손, 치우천황의 후손, 동이족, 예맥족의 후손인 우리가 남북으로, 동서로,
  국가가 갈리는 사이 나라는 옛날 신라 정도의 小國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우수한 머리와 심성 고운 大한민족이 설 땅은 어디인가?
  대한민족의 영광의 시대가 100년 내에는 오리라고 본다.
  
   델리공항에 도착하자, 약간의 비가 내려서 우리를 반겨 주었다. 카레 냄새와 더불어,
  계속되는 크렉션 소리, 릭샤왈라와 자동차의 혼잡스러움, 사람들의 고함소리 등......
  천상(비행기)에서 지옥으로 내려온 느낌이다.

   호텔은 비가와서 그런지 크기는 하나, 썰렁함 자체이다. 피곤이 몰려와 샤워를 하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 날 부실한 아침 식사를 하고 관광을 시작했다. 날씨는 비온 다음날이라서 그런지,
  바람이 불고 약간 흐른 날씨였다. 처음 간 곳은 이슬람 사원인데, 이슬람 사원 중 가장
  규모가 큰 사원이다. 이슬람 사원은 신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준비한 덧신을 신고,
  들어갔다. 자미 마스지드라는 사원인데, 무굴제국의 샤 자한 왕이 건축했다고 한다.
  인도는 사암이 많아서 대부분 건축물은 붉은 벽돌 색이었다. 사원은 황량한 벌판처럼,
  넓고 시원했다. 본당 입구 쪽엔 연못이 있어서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한꺼번에 날아가는 비둘기가 사원의 엄숙함과 성스러움을 더해 주었다.
  이슬람 신자들은 서쪽을 향해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하늘을 향해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첨단 등 신을 향한 경배의 표현이지 않을 까.
  건물의 벽에는 코란이 적혀 있었다. 어느 책에서 코란의 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세상의 다리. 그 곳에 집을 지으려 말고 지나가라.
    순간을 원하는 이가 영원을 얻을 수 있다.'
  참 철학적인 글이다. 사원에 올라서 바라본 델리는 인도사람들의 활력이 느껴졌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끝없는 대립의 과정에서 힌두교의 한 분파인 시크교가 탄생했다고 한다.
  전사의 후예라고도 하는 시크교도는 터번을 쓰고 있어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시크교도가 총인구의 1.9%인데도 경제적으로 상위 1%안에 든다고 한다. 대부분이 사업을
  한다고 한다. 시크교도는 나눔을 실천하는 종교다.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나 사원에 오면
  식사를 대접한다고 한다. 우리 나라 절에서 식사를 주는 것과 비슷하다.
  시크교 신도들은  문 입구에서 문턱에 손을 대고, 갈 때도 문턱에 손을 대서 사원에 왔다 감을
  표시한다고  한다. 우리의 문턱을 밟지 않는 문화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입구에 가보니 식사를 준비하고 또 한쪽에선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시크교 사원은
  오리온 쵸쿄파이 처럼 情이 느껴진다. 인간은 따뜻한 피가 흐르는 동물이지 않은가!
  황토색 손수건을 터번처럼  머리에 두르고, 시크교 사원 내부를 관람했는데,
  수 많은 사람과 화려한 복장의 사람들, 손과 발을 씻는 연목 속에 팔뚝만큼 큰 잉어들,
  사원 지붕은 금으로 칠해져서 화려하고, 따뜻한 활기와 온화한 미풍이 불어서 참 아늑한 곳이었다.
  한쪽에선 공사를 하고 있어 새로운 사원을 만든 다고 한다. 조감도를 보니 금색으로 외관을
  칠해서 참 아름다울 것으로  예상된다.


    프랑스 개선문처럼 생긴 인디아게이트를 갔는데, 1차 대전 때 참전했던 군인들의 위령탑
   이라고  한다. 인도 대통령궁과 국회의사당을 버스로 지나면서 보고, 인도의 젖줄인
   갠지즈 강을 보기위해 바라나시로 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갔다.


   기차가 오후 3시에서 오후 8시로 연착되어서 다시 델리 시내로 와서  바하이 사원을 갔다.
  바하이 사원은 호주의 오페라 하우스와 비슷한데, 연꽃사원이라고도 부른다.
  참 아름다운 사원이다. 시크교가 힌두교에서 파생된 것이라 보면, 바하이교는
  이슬람교의 한 분파이다. 흰 대리석으로 만들었는데, 참 멋지게 만들었다. 바하이교는
  모든 종교의 통합을 주창한다.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바하이 사원 내에서는 침묵을
  해야 한다. 아름다운 연꽃사원 입구에 있는 연못은 석회석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실내로 들어가니, 조용하고 모든 소리를 흡수하듯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다.
  시간이 멈춘 듯이 차분한 고요가 느껴지는 맑고 깨끗한 사원이다. 나도 자리에 앉아
  맑은 정신으로 신께 기도를 드렸다. 경건한 마음이 저절로 울어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주변 정원도 무척 넓고, 참 아름답게 조경이 되어 있었다. 인도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참 흐뭇했다. 오는 길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서 힌두교 사원을 간단히 보고
  기차 역으로 갔다.

   기차는 8시에 도착하기로 했는데 또 연착이 되어서, 언제 올지 기약할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22명의 일행들은 모두 망부석이 되어서 아무 말이 없었다. 인도는 기다림과
  체념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인도의 발전은 더딜 것 같다. 그 동안에
  인도인들의 생활상을 바로 옆에서 지켜 볼 수 있었다. 짐을 엄청나게 이고 가는 사람들,
  수레에 짐을 가득 실어 나르는 짐꾼들, 자리를 깔고 체념과 친구가 되어 있는 사람들,
  기차 역은 화장실과 쓰레기장이 되어 악취가 사방에서 올라오고, 쥐들은 기차 길에서 떼지어 다니고,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 지옥의 중심에 있었다. 몰려오는 졸음과 온 몸이 힘들게 느껴질 때
  인도 가이드는 귤, 과자, 오렌지 쥬스, 햄버거 등을 가지고 와 지루함과 힘듬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었다.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일출봉에 기차 오거든 날 불러 주오
  월출봉에 기차 오거든 날 불러 주오. 기~다려도 기이이~다려도
  기차 오지 않고 엉뚱한 기차(다른 기차)소리 엉뚱한 열차 소리에 눈~물 흘리네'~
  너무나 힘들고 힘들었다. 지금까지 여행 중 가장 힘든 순간이지 않나 생각된다.

   몇 시에 왔나 기억도 없지만,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차가 왔다. 침대기차인데,
  이집트 기차에 비해서도 형편없이 질 낮은 기차였다. 또 다른 고행의 시작이었다.
  기차를 놓칠세라 무거운 가방를 들고, 좁은 통로를 사람을 비집고, 밀고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2층 침대에 힘겹게 올라 바로 허리를 펴고 누우니, 이 곳이야 말로
  바로 천국이 아닌가. 천국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 바로 지금 이 곳에!
  있는데, 우리가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바로 꿈나라로 무비자로 입국하여 꿀같이
  달콤한 잠에 빠져 들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점심때가 되어 있었다. 일어나니,
  같이 간 일행 중 犬毛[개털]이라는 필명을 가진 詩人분께서 한 숨도 안자고, 혹시나
  일행이 도둑을 맞지나 않을까 하고, 보초를 서고 계셨다. 참 고마웠다. 한식으로
  김치와 더불어 식사하고, 귤을 먹고, 컵라면을 추가로 먹고 원기를 회복했다.
  꿀 잠과 꿀 식사가 합해지니 이 것이 바로 天國이 아닌가 ^^;
  갑자기 기차가 멈추었다. 인도사람들이 시위를 하여, 기차가 가지 못한다고 한다.
  한 두 시간 정도 후에 기차가 다시 가고, 어쨌든 거의 하루를 기차에서 보냈다.

   기차 내에선 인도인들이 즐겨 마시는 짜이를 파는 사람과, 과자를 파는 사람들이
  통로로 쉴 사이 없이 지나다녔다. 기차 밖 풍경은 시골 집들이 보이고, 아이들과
  사람들이 기차 길 주변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다. 따로 화장실이 없고, 집 밖이
  화장실인 것 같다. 모두 하나 같이 피트 병을 들고 다닌다. 아마도 일을 본 후에
  뒷처리를 하려고 가지고 다니는 것 같다. 드디어 갠지즈 강이 있다는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정말로 힘든 기차 여행이었다. 인도여행 자체가 바로 고행이다.
  
    바라나시에 도착해서 샤르나트 박물관에 들어갔다. 힌두교와 불교의 유적을
  둘러 봤다. 힌두교는 창조의 신 부라흐마와 법의 신 비쉬누와 파괴의 신이자 정력의
  신인 쉬바로 나뉜다. 가장 인기 있는 신이 쉬바라고 한다. 입구에 샤르나트 사자상이
  있었다. 이 사자상은 아쇼카 석주상단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네 마리의 사자가
  사방으로 서 있는 것이다. 인도 루피화 지폐에 나와 있는 바로 바로 그 사자상이다.
  그 옆에 있는 녹야원으로 들어가니,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와 초록색  잔디가
  예쁘게 꾸며져 있어 그 동안의 기차 역에서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입구에서 정면에 다멕 스투파라는 거대한 탑이 있었다. 부처가 다섯 도반에게 처음으로
  행한 설법인 초전법륜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용도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보리수 나무에서 기념사진 한 컷을 찍었다. 보리수 나무 열매는 염주를
  만드는데 쓰여진다고 한다.건물은 부서져서 절터의 기둥만 남아 있었다.
  야쇼카 석주 기둥이 다섯 조각으로 부서진 상태로 보관된 곳을 보았다.
  석주 상단은 좀 전에 본 샤르나트 박물관에 샤르나트 사자상이 있었다고  한다.
  세계 3대 종교 중에 하나이면서, 인도에서 시작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불교신자는
  인도 인구의 약 0.6% 정도라고 한다. 힌두교의 비쉬누의 화신이 부처인 까닭도 있지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라비아인들이 아라비아 숫자를 만들었지만, 정작
  아라비아인 본인들은 아라비아 숫자를 쓰지 않고, 세계인들이 쓰는 것처럼......

    기차에서 기다림과 장시간의  기차여행으로 체력이 고갈되어서, 오아시스같은
  인디아 호텔에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녹야원처럼 편안한 낙원을 꿈꾸며......

   다음 날 역사보다 오래된 도시 바라나시의 아침을 보기 위해 일어났다.
  갠지즈강은 강가라고도 한다. 바라나시에 가면 인도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힌두교와 이슬람의 충돌이 가장 심한 바라나시, 강가와 맞닿아 있는 계단을 가트라고
  하는데, 약 100 여 개의 가트가 있다. 새벽에 짚차를 타고 갠지즈강으로 갔다.
  인도인들은 갠지즈강을 향해서 엄청난 인파들이 무슨 운동회를 하는 것처럼
  부지런히 부지런히 걸어 가고 있었다. 인도인들의 이런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갠지즈 강물에 목욕을 하는 것을 대단한 것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갠지즈강의 강물을
  항아리에 담아서 집안에 놓고, 일반 물에 약간 넣어서 성스럽게 사용한다고 한다.
  가트위에는 삼지창을 들고 나체로 왠 남자가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가이드에 물어
  보니, 스님이라고 한다. 참 알 수 없는 나라 인도. 힌두교 의식인가 보다.
  조각배를 타고 갠지즈강을 한 바퀴 돌면서 주변을 구경하는데, 가트주변엔 목욕하는 사람,
  머리 감는 사람, 물 마시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 물건 파는 배, 물고기 파는 배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어우러져 있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갠지즈 강이 있었다.
  예전에 가트가 왕족의 소유였다고 한다. 떠오르는 붉은 태양이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배에서 바라본 풍경은 과거로의 여행 같았다. 중세시대로 온 것 같았다.
  '바다에서의 아침은
   마치 세상의 처음을 보는 것 과도 같다.'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멋진 한 폭의 그림이었다.
 
   잔잔한 갠지즈강물과 붉은 태양의 떠오름의 절묘한 조화가 세상의 처음처럼
  희망을 보여 주었다.

  화장터에서 일하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들은 카스트제도에서 최하위계급인
  불가촉천민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로 보면 백정이나 갖바치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인도의 모든 것은 갠지즈강에 있었다. 인도의 모든 속된 것과 성스러운 것을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는 갠지즈강의 위대함이 있었다.
  
   배에서 내려 우리 나라의 골목길 같은 길을 걸어서 나왔다. 주변은 악취와 더러움으로
  조심 조심 걸었다. 완전 미로였다. 오는 길에 도로에서 만난 깜찍한 유치원생과
  귀여운 초등학생들과 더불어 사진 한 컷, 바라나시는 우리 나라 70년대 중반 정도의
  느낌이었다. 어린이들을 보니 인도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 보였다.
  
   짚차를 타고 인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바라나시를 뒤로 하고, 카쥬라호로 떠났다.
   짚차 여행은 힘들었지만 앞선 기차 여행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저녁 늦게 도착한 카쥬라호의 한 호텔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카쥬라호에선 에로틱 힌두교 사원을 보았는데, 성행위장면이 노골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아주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이 많았다. 사원 내에는 소[牛]동상과 링가가
  있었다. 카쥬라호 에로틱 사원은 性과 종교를 기묘하게 접합 시킴으로써  오늘 날까지
  살아 남은 것 같다. 85개 사원 중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파괴되고, 22 개만 현재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예전에 인도에 수 많은 왕국이 있어서 왕권을 강화하려면 인구가
  많아야 왕국이 강하고 발전할 수 있으므로 해서 출산을 독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쨌든 카주라호 사원 앞에 극성스런 잡상인들이 짜증나게도 했지만, 다양한 조각품은
  그 당시  인도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앙코르 와트에 비하면
  예술성은 많이 떨어지는 것 같다.

    그 후, 자이나교 사원을 방문했는데, 청아한 종소리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고요한 사원을 맑게 하는 것 같은 분위기다. 자이나교 스님들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로 수행한다고 한다. 남자만 스님이 될 수 있는데 지금은 추워서 남인도로 가 있고,
  사원에는 신도들만 있었다.  극단적인 무소유라고 볼 수 있다.

   그 후 잔씨로 떠났다.
  짚차 기사는 무슬림인데, 조용히 운전해서 우리들은 편안했다. 가는 길에 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고 그림 같은 주변 경관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햇빛과 가벼운 미풍이 여행의
  느긋함과 편안함을 더해 주었다.

    잔씨 도착 후 아그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이번 기차는 다행히 정시에 도착해 있었다.
   기차를 타고 아그라로 가는데 자리는 역방향이었다. 뒷 좌석에 일본 여행객을 만났다.
   여자 둘이서  인도인 개인 가이드를 고용해서 여행 중이었다. 한 명은 은행에 다니고,
   또 다른 한 명은 화학 회사에 다닌다고 한다. 나이는 28살 정도라고 한다. 휴가를 내서
   인도를 찾았고, 물어 보니, 해외 여행 경험은 많았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귀엽게 생긴 여자 둘이서  여행을 하는 것을 보니  참 대단한 여자들인 것 같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G7에 속한 나라.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경제규모가 약 12위 정도
   라고 하는데, 일본은 지진과 해일이 수시로 일어나는 지대에서  경제를 대단하게 키워
   경제 강국이 되어 있다.  어쨌든 우리는 일본을  건너 뛰어 세계 강국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더욱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기차길 주변에 볼일을  보는 사람들, 소똥을 연료로 쓰기 위해 말려서 탑처럼 쌓아 놓은 
   광경들, 기차에서 내리기가 겁났다. 무굴제국의 옛 수도인 아그라에 도착했다.
   호텔중앙에 작은 분수가 있어 시원한 느낌과 자연의 편안함을 주었다.
   컵라면을 먹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인도에 온 목적이자, 최고의 하일 라이트인 타지마할을 보기 위해
   서둘러 일어났다. 날씨는 화창하고 햇빛은 따뜻해 관광하기엔 딱 좋은 기후였다.
   인도를 호령했던 무굴제국 시대 5대 황제인 샤 자한의  부인인 뭄타즈 마할의
   무덤이 바로 타지마할이다.
   지혜와 총명함으로 사랑받던 부인이 출산 도중 세상을 떠나자, 뭄타즈 마할에 대한
   그리움을 화려한 무덤을 건설하는데 집중하게 된다. 건설은 1632년부터 22년 동안 계속되었다.
   건축인원은 약 20 만 명, 코끼리 1000 여 마리 등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건축설계는
   이란, 이탈리아, 프랑스, 터키, 중국 등 다양한 기술자들을 동원하고, 장식은 피에트라
   두라 기법이 사용되었다. 이탈리아 피렌체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피에트라 두라 기법은
   대리석에 꽃들의 문양을 판 뒤 그 홈에 각각 다른 색의 돌이나 준 보석을 박아 넣은 것이다.
   흰 대리석의 아름다움을 빛나게 해주는 타즈마할

     입구에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청아하게 들렸다. 날아오르는 많은 새들과 더불어
   약 370 여 년 전의 과거로 여행은 시작되었다.
     사진 속에서만 보던 타지마할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는 감동이란 엄청났다.
   말이 필요 없었다. 타지마할 중앙 수로에 또 하나의 타지마할이 투영되어서 신비로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타지마할은 청색, 노란색, 백색 등 다양하게 시간에 따라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고 한다. 그러나, 흰색으로 보이는 정오 때가 더 아름답지 않은가 생각된다.
   순백색의 고고한 아름다움이 샤 자한의 처절한 그리움을 더 잘 표현하는 색이 아닐까?
     조그마한 빛의 변화에도 다양하게 살아 숨쉬는 타지마할은 하루에도 얼마나
   수 없이 화장을 하나? 그러나 미인일수록 화장을 얇게 하듯이 난 타지마할의 순백색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백합같은 맑음. 타지마할의 새하얀 대리석처럼
   인생의 힘든 여정에서도 맑고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살아가야 겠다.
 
    무굴 제국은 장남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장자 상속제가 아니라, 철저한 능력제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왕자들은 황제가 죽거나 중병에 걸렸을 때를 대비해 개인군대를 거느렸다.
   이는 끝없는 피를 부르는 결과를 낳았다. 무굴제국은 숱한 권력투쟁의 연속이었다.
   당나라 두 번 째 황제인 이세민이 형과 동생을 죽인 '현무문의 변'이나, 조선시대 네 번째
   왕인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도 비슷한 경우라 볼 수 있다.
   무굴제국은 이슬람 지배자였다. 무굴제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악바르 시대가 최고의
   전성기였다. 악바르는 샤 자한의 할아버지이다. 악바르 황제는 힌두교와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정책을 펼친다. 인도 역사상 황제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은 아쇼카왕과 무굴제국의
   악바르 황제 정도라고 한다. 우리 나라도 무굴제국을 他山之石  삼아 분열보다는 포용하고
   관대하게 통합하는 법을 리더들은 배워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강국으로 가는 제일 첫 번째
   조건이라고 본다. 왕비에 대한 애절한 사랑과 그리움이 담겨져 있는 흰 대리석의 아름다운
   타지마할이  현재까지 이어져,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을 전 세계 에서 지금까지
   계속 불러 모으고 있다.

    타지마할의 관광을 끝내고, 이슬람 건축물인 타지마할에 견주어 힌두교에서도 뛰어난 건축물을
   만들고 있다고 해서, 찾아간 곳이 더 알박 사원이다.
   100 여 년 전부터 짓고 있고, 앞으로도 90 여 년은 더 지어야 한다고 한다. 외부는 타지마할에
   비하여 떨어지는 것 같고, 내부는 상당히 세밀하게 잘 꾸며 놓았다.


     다음은 시크리성, 일명 유령도시의 城을 보러 갔다. 무굴제국의 황금시대인 악바르
    황제시대 짧은 기간 동안 수도로 삼았던 시크리성.
    악바르 황제가 뛰어났지만, 단 한 가지 고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후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 저기 수소문하던 끝에 한 수도승을 만나 예언을 듣고 아들을 여러 명
    얻게 된다. 아들을 얻게 된 연유로 시크리로 수도를 옮겨 온다. 시크리성은 18 년 동안
    지어서 단 14 년만 사용하고 버려지게 된다. 그 이유는 물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그렇게 버려져서 아직까지 깨끗하게 잘 보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악바르 황제는
    다시 아그라로 천도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이 없는 유령도시가 되었다.

      긴 시간 방치해서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앙코르 톰처럼 폐허에서 오는 묘한
    아름다움과 그 당시 과거로 온 듯한 생생한 느낌이 든다. 투박하지만 秘景을
    감추고 있는 시크리성은 보기에 비해 크기는 엄청나게 컸다.

      입구에서 시원하게 초록색 잔디가 펼쳐져 있었다. 정원도 참 아름답고 반듯하게
     잘 꾸며 놓았다. 난간이나, 건물기둥 곳곳에 돌로  조각이 되어 있었는데 
     붉은 색이라서 그런지 꼭 나무를 깎아 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 당시에 돌을 나무처럼 세밀하고 정교하게 깎는 기술이 대단했던 것 같다.
     알현실 난간 조각 그림들이 하나 하나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무늬도 난간마다
     다 다르게 조각되어 있었다. 건축 기술의 섬세함과 예술성이 아주 뛰어난 것 같다.
     바닥도 별 모양 비슷하게 예쁘게 장식되어 마카오의 세도나 광장의 물결무늬처럼
     아름다웠다. 너무 커서 구경하기에도 힘들었다. 도서관도 있었고, 황제의 침실도 있었는데,
     황제의 침실은 뒤쪽에 백성들이 항상 황제를 볼 수 있도록 창문을 설치해서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무굴제국의 전성기였던 만큼 시크리성의 위용도 대단했다.
     붉은색의 건물과 정원의 초록색 잔디가 잘 조화를 이뤄서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었다.

      최고의 황제가 다스리는 시기답게  시크리성 건축물들도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규모도
     엄청나게 컸다. 나중에 물이 부족해서 성안 백성들은 시크리성 바깥으로  옮겨 와서
     현재의 도시 자이푸르를  만들었다고 한다.

      자이푸르는 핑크시티라고도 한다. 건물 색상을 분홍빛으로 칠해 놓아서 핑크시티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특이한 색상이다. 인도에서는 붉은 색이 환영을 뜻한다고 한다.
     핑크시티는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던 당시 영국의 왕세자가 방문했을 때 마하라자라는
     왕이 온 도시를 분홍색으로 칠해 열렬한 환영을 표시했던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도시를 지나면서 보니 핑크의 바다였다. 우리버스는 그 바다를 항해하는 조그마한
     조각배였다.

     자이푸르로 버스로 이동하여 작지만 깨끗한 호텔에서 여정을 풀었다. 지금까지 묵었던
     인도 호텔 중 제일 깨끗한 것 같다.

      오늘은 아침에 코끼리를 타고 아멜성을 가게 되었다.
      가는 길에 또 물위의 궁전이 있었다. 작은 호수 중간에 궁전을 세워 놓았는데,
     무굴제국의 화려하고 정교한 건축기술이 느껴졌다.
     코끼리를 타는데 지상으로부터  높이가 있어서 상당이 두려움이 있었다.
     코끼리가 조금만 몸을 흔들어도 그 울림으로  인해 정신이 없었다.
     코끼리 등에 붉은 카펫을 깔고 그 위에 의자를 설치해서 두 명 정도 탈 수 있게
     되어 있고, 코끼리 기사는 머리에 붉은 천을 두르고 있었다.
     가는 동안 주변 경관을 보니 아멜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멀리 산 주변으로
     장성이 이어져 있는데 마치 중국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아멜성은 약 19km
     라고 한다. 무사히 아멜성 입구에 내렸다. 대지에 발을 밟고 서자 안정이 되었다.
     사람은 역시 흙을 밟고 살아야 하나 보다. 높은 곳은 현기증과 손에 땀이 나고
     속이 울렁거려 오래 있기에 힘든 것 같다. 시크리 성처럼 정교하게 돌로 조각이 되어
     있고, 크기도 꽤 큰편 이었다. 성벽 주변엔 코끼리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있었다.
     시크리성은 難攻不落의 요새다. 고구려때  양만춘의 安市城처럼.
     성 내부의 조그마한 복도는 미로처럼 얽혀 있어 외부 침입자는 성벽을 타고 넘었다
     하더라도  성내로 진입하는 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미로 같은 복도 중간 중간에
     보초가 있어 암호를 대지 못하면 침입자는 곧바로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다. 왕비의 방에는
     아름다운 음각 조각들이 많이 있었다. 음각 조각에 보석을 넣어서 예쁘게 만들었는데, 나중에
     영국인들이  보석을 다 파가지고 갔다고 한다. 또 벽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 시원하게
     바람이 들어 올 수 있도록 하고, 물이 흐르게 하여 바깥 더위와 대항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많은 복도와 회랑이 있어 미로처럼 이어졌다.

      어떤 방 안에는 절구 비슷한 것이 있어서 요리를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창문도 벽에
     조그마한 구멍을 비스듬하게 사각형으로 구멍을 뚫어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게 만들어 놓았다.
     왕의 침실은 벽면과 천장을 유리로 만들어서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성 위 에서 내려다 보면 호수와 왕의 연회장이 한 눈에 시원하게 보였다.
          

       호텔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다시 오후 관광을 시작했다. 먼저 간 곳은
     천문대라고 하는데 해시계와 별자리 보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상당히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후 시내를 지나서 바람의 궁전이라고 불리는 하와마할까지
     갔다. 하와마할은 왕의 부인이나 귀족의 부인들이 바깥 출입이 제한 되었으나, 창을 통해
     시가지를 구경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창문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불어 왔다.
     자연의 에어컨이었다. 바람의 궁전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 하였다. 창문 등의 구멍이 약 500
     여 개가 나 있다고 한다. 오후의 햇살은 따뜻하고  푸르른 하늘과 하얀 조각 구름
     우리 나라 날씨와 비슷했다. 바람불어 좋은 날처럼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인도 연인과 인도 여자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모두 바람이 났나?
     아니면 순수하게 바람을 맞기 위해서 나온 걸까? ^^; 
     관광이 끝나고  버스에서 헤나 문신을 하게 되었다.
     헤나 문신은 천연 헤나로 피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헤나 반죽이 마를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마르면 떨구어 내고 레몬즙을 바르면 된다.
     약 일주일 지나면 사라진다고 한다.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없어진다고 해서 헤나
     문신을 해 봤는데, 꽃 그림을 그려 주었다. 주로 꽃이나 물고기를 주로 그리는 것
     같았다.
     자이푸르 바람의 궁전 근처 시장에서 쇼핑을 하는데, 신발가게에서 한 30분 쉬면서
     일행들이 물건을 사는 걸 가만히 지켜보니, 역시 한국인은 쇼핑의 달인이면서도
     흥정에도 달인이었다.
     일몰이 질 때 힌두 사원을 방문했는데, 힌두 사원내 앞쪽엔 비쉬누신이 부인과
     같이 조각되어 있었다. 신도들에겐 별 사탕 같은 것을 나눠 주었다.
     Wall street Hotel로 복귀하여 저녁식사후 컵라면을 먹고  짐을 정리하고 취침을 했다.
 
      이제 한국으로 가는 날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호텔 주변을 느리게 산보했다.
     짜이를 자전거로 나르는 사람, 손수레를 몰고 가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새벽이라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아침을 열기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아침 식사 후 델리로 출발했다. 델리에 있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쿠툽탑을 관람했다.
     이슬람측에서 기존 힌두교 사원을 파괴하고 지은 것이다. 3층까지는 붉은 색 사암으로
     건축되고, 4층 ~ 5층은 대리석을 사용해서 만들었다. 약간 기울어져 있는데 지진을
     대비해서 처음부터 그렇게 기울게 건축했다고 한다. 이슬람교의 예배시간을 알리는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탑을 어느 높이까지 건축하고 위에서부터 돌을 깎아 내려
     오는 방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쿠툽탑 근처에선 남인도에서 온 뮤직비디오 같은
     것을 찍는 제작진과 배우들이 와서 노래를 틀어 놓고 촬영을 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 비하면 별로 볼품이 없었는데도 인도 사람들은 주변에 구름떼 처럼
     모여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모든 일정을 끝내고 공항으로 갔다. 이번 여행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기차 역에서의 기다림, 장시간 기차여행, 장시간 차로 이동, 실제 본 것 보다
    교통수단으로 이동한 시간이 훨씬 많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교통수단으로
    이동하며 인도 사람들의 생활상을 가까이서 자세히 본 것이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갠지즈강의 아침, 순백색의 아름다운 타지마할, 섬세한 시크리성, 천혜의 요새 아멜성,
     멋스러운 바하이사원, 핑크빛의 현란한 하와마할 등이 기억에 남는다.

      여행을 같이 간 아저씨는 때론 큰 형님처럼 아버님처럼 느껴졌다. 항상 우리에게
     웃음을 잃지 않게 해준 왕 언니와 친절하게 설명을 잘 해준 인도인 현지 가이드,
     마음이 푸근한  시인분 등  많은 분들이 기억에 남는다.

     여행이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때는
     한결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정이 넘치는 따뜻한 마음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현재로 돌아오는 것이다.
    
     여행을 마칠 때는 - 돌아 갈 곳이 있으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有歸巢  不亦樂乎)

     힘든 고행의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준 신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나마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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